말씀묵상15 | 그리스도인의 두려움(2) - 현실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첫 번째 두려움은 어둠이 예수의 실재를 가릴 때 일어난다. 반면, 두 번째 두려움은 현실 속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할 때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은 어둠과 현실 앞에서 이중의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은 결국 예수를 따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움 속에 빠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실재함을 드러낼 것이며, 의심 가운데 손을 내밀 때마다 우리를 붙잡아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첫 번째 두려움은 어둠이 예수의 실재를 가릴 때 일어난다. 반면, 두 번째 두려움은 현실 속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할 때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하늘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늘나라를 세상 속에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같은 그리스도인이 보기에도, 그들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10:7은 각각 이 선포가 세례 요한, 예수, 제자들에게 해당한다.)고 선포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를 그저 저 먼 하늘에 그냥 두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중에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에 만족한다.

들소리신문 DB
들소리신문 DB

 

필자는 하늘나라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꿈꾸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땅에서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세상은 이들이 있었기에 과거보다 나은 세상이 되었음에 틀림 없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머물던 세상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바로 그 세상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주던 만족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에게 갔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세상으로 건너간다. 예수와 함께 건너가는 세상은 이전의 세상이 아니며 하늘나라가 건설되는 현장이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예수가 건너니 우리도 건널 수 있다. 그 나라를 가져온 예수가 건너라고 했으니 우리는 그를 믿고 먼저 건너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과 감각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앞에서 우리를 멈추게 한다. 이때 두 번째 두려움이 밀려온다. 첫 번째 두려움이 어둠 때문에 예수를 환영으로 인식하면서 찾아온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이 갖는 두 번째 두려움은 현실에서 온다. 그렇다고 현실이 두렵다는 뜻은 아니다. 현실은 예측 불가능하고 고달프기는 해도 두려운 대상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이 두렵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보자. 그들은 현실이 두려워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를 바랐기에 가혹한 현실이 그들에게 두렵게 다가왔던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마태 14:28-29)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를 직접 보고,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27절)는 그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첫 번째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예수는 베드로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어둠에서 예수가 실재하는 밝은 곳으로 이끌어냈다. 그러자 베드로는 어둠이 걷히고 밝아진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환영이 사라진 명료한 현실 속에서 예수는 물 위에 서 있지 않은가. 밝은 가운데 보고 들은 예수, 실재하는 예수도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환영이 아닌 실재로 인식된 예수가 그를 부르기만 하면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주님, 주님이시면.” 그는 물 위에 서 있는 이가 예수가 확실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서 말한다.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베드로에게는 물 위에 서 있는 예수도 현실이며, 어부로서의 경험 속에 있는 호수도 현실이다. 이 두 현실 사이에 믿음과 두려움이 공존하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30)

이때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본 베드로는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 두려움은 실재를 확인한 예수조차도 경험에 의한 현실 뒤로 물러나게 한다. 그러자 예수보다 우선이 된 현실이 그를 물에 빠져들게 한다. 두려움은 자각된 현실 앞에서 예수의 가능을 불가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스도인의 누적된 현실감각은 실현가능한 하늘나라를 불가능한 것으로 확정해 버린다. 우리는 뼛속 깊이 각인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많이 예수를 부인하고, 또 그의 명령을 거부했던가! 베드로는 예수에게 살려달라고 외친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1-33)

예수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는다. 그런데 자신을 유령이라고 하면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아무 책망도 하지 않았던 예수는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풍랑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두려움과는 달리, 이미 실재를 확인한 예수 앞에서 베드로는 현실이 주는 두려움을 핑계로 그의 믿음 없음을 변명할 수 없다. 베드로 앞에는 두 개의 현실만이 존재한다. 예수가 가져온 하늘나라라는 현실과 어부로서 경험에 근거한 세상이라는 현실이다. 예수도 현실이며 풍랑이 이는 호수도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늘나라도 현실이며 세상도 현실이다. 베드로에게는 선택만이 남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체득한 현실이 아닌 새로 등장한 경험하지 못한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란 더 나은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베드로의 믿음은 분명 부족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두려움은 예수와 더불어 하늘나라를 가지고 세상에 들어서기 직전 닥치는 현실적 삶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경험으로 체득한 삶의 무게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의심하도록 한다. 우리가 건너가 이루어야 할 하늘나라는 세상을 부인하고 예수와 동행하겠다는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생생한 현실과 부딪칠 때 오는 두려움은 예수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

예수는 제자들을 ‘먼저’ 건너편으로 보냈다. 생각해 보면, 예수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사실은 동행이지만) 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수가 먼저 건너가서 다 이루어놓고 우리를 부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늘나라가 하늘에만 있다고 믿는다면 그럴 것이다. 하늘로 올라간 이는 예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 예수는 우리를 먼저(사실은 동행하지만) 보내기에, 우리는 현실이 주는 두려움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어둠과 현실 앞에서 이중의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은 결국 예수를 따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움 속에 빠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실재함을 드러낼 것이며, 의심 가운데 손을 내밀 때마다 우리를 붙잡아 줄 것이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