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compassion:불쌍히 여김, 연민)과 오병이어 기적(5) - 기적에서 일상으로

15년 이상 장애를 지닌 다정이와 함께 하기 위해서(com) 집으로 데려와 돌보았던(passion) 이야기…이것이 연대의 정에서 시작된 다정이에게 일어난 네 번째 기적이다.

기적 너머의 기적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다. 반대로 일상에는 기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일을 무척 어렵게 여기면서 실제로 거의 하지 않는다. 빵과 물고기만으로도 충분한(?) 기적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도 함께 사는 것은 못한다. …예수는 다정이를 위해 우리를 공동체로 불렀다. 공동체의 관심과 지원이 다정이를 가정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돌볼 수 있게 한다.

필자가 목회를 시작할 무렵, 선배 목사들은 이런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쌀독에 쌀 한 톨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내일은 굶어야 하나!’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쌀독을 채워주었고, 중 고등학생 자녀가 학비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학비를 몰래 놓고 가더란다. 하나님은 꼭 필요할 때마다 기적처럼 채워 준다.

기적 같은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아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목사는 이제 기적을 베푸는 목사가 되었다. 그가 (사실은 교회가) 마련한 쌀을 가지고 이웃을 찾아갈 때면, 그 이웃은 ‘마침 쌀이 떨어졌는데!’라고 말하면서 놀라움과 감사를 표시한다. 그가(사실은 교회가) 선교비를 모아 선교사에게 그 돈을 전달하면, 때마침 기적이 필요한 이들이 등장한다. 당장 수술하지 못하면 죽게 될 누군가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가 쌀과 돈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기적이 뒤따른다.

하지만 기적이 하나님의 살아있음과 능력을 드러내는 그렇게 좋은 일이라면, 그는 여전히 배고프고 가난한 목사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을 향해선 기적에 의지하며 감사하라는 목사가 기적이 필요 없는 부에 더(?) 감사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서른 살이 되어가는(사람들은 아직도 10대로 본다) 다정(가명)은 뇌전증(간질병)을 가지고 있는 발달장애 청년이다. 초등학생 시설, 엄마는 또래보다 몸집이 왜소한 다정이를 데리고 대형마트 등을 다니면서 물건을 훔치도록 했다. 사람들은 영양실조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다정이를 혼내는 대신 먹을 것도 사 주고 옷도 사 주었다. 다정이에게 이것은 첫 번째 기적이다. 다정이는 도둑질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렇게 다정이가 얻어온 것들을 시샘하면서 모조리 빼앗았다. 심지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은 가위로 조각내 버렸다. 때때로 다정이는 뇌전증 발작도 일으켰다. 가정 문제를 파악하고 있던 동사무소의 사회복지 담당자는 다정이가 장애인 시설에 있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담당자는 양육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부모를 설득해 아이를 장애인 보육시설로 보냈다. 이것이 다정이에게 일어난 두 번째 기적이다.

물론 장애인복지시설에도 기적은 있다. 아니, 이런 곳에 더 많은 기적이 있다. 시설에는 후원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꽤 많다. 예뻐 보이는 옷이라면 늘 엄마에게 빼앗겼던 다정이는 때때로 들어오는 멋진 옷을 입게 될 것이고, 끼니를 거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성탄절이나 명절에는 후원자들이 열어주는 파티에도 참석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로 다정이에게 찾아오는 기적이리라.

이러한 방문과 파티에 후원자가 되어 찾아간 목사와 교인들은 자신들의 후원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시설 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으며 감격해 하며, 자신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축복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기적을 베푼 목사는 생각한다. 젊은 시절 쌀을 가져다주고, 학비를 마련해 주었던 하나님의 기적에 자신이 감격하고 감사했듯이, 다정이도 그러하리라.

하지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기적 어디에도 연대의 정(compassion)은 없다. 불쌍히 여기거나, 사무적 일 처리거나, 행사의 일부일 뿐이다. 사실, 세 번째 기적은 다정이에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네 번째 기적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다정이가 시설에 입소했을 때, 시설 관계자들은 기저귀를 채웠다. 다정이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집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 시설은 다정이를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다. 등하교를 위해선 누군가가 데리고 다녀야 하는데, 한 아이 만을 위해 인력을 낭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설은 일주일에 한두 번 방문교육을 시킨다고 둘러댔다. 시설은 자신들의 편익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다정이를 통제했다. 이런 곳에서 기적이 반복된들 그것이 다정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필자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다정이의 이런 모습을 차마 모른 척 두고 볼 수 없었다. 공동체의 한 가정이 부모를 설득해 다정이를 시설에서 데려왔다. 사실 다정이는 새로운 가정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도둑질을 했다. 익숙해진 도둑질을 멈추는 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설은 다정이가 기저귀를 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새로운 가정에서 그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 가정은 다정이가 특수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등하교시켰다. 졸업할 즈음에는 통학버스를 타고 등하교할 정도가 되었다. 지금 다정이는 여전히 돌봄이 필요하지만 시설이 아닌 독립된 집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사실 동네 사람들을 속 썩일 때가 많긴 하지만, 이웃들은 다정이를 이해하며 한 동네에서 함께 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것이 15년 이상 장애를 지닌 다정이와 함께 하기 위해서(com) 집으로 데려와 돌보았던(passion) 이야기이다. 이것이 연대의 정에서 시작된 다정이에게 일어난 네 번째 기적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기적 너머의 기적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다. 반대로 일상에는 기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일을 무척 어렵게 여기면서 실제로 거의 하지 않는다. 빵과 물고기만으로도 충분한(?) 기적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도 함께 사는 것은 못한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정이는 누군가 혼자 키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혼자 하라고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다정이를 위해 우리를 공동체로 불렀다. 공동체의 관심과 지원이 다정이를 가정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돌볼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묻곤 한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필자의 대답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너희 중에 형편이 되는 사람이 다정이를 돌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우리에게 ‘너희가 다정이를 돌보라’고 했다. 돌봄은 공동체의 고백이어야 한다.

기적이 일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하다. 한 위탁가정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다섯 살 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정서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병원에 데리고 다녀야 했다. 우리나라에는 위탁을 지원하는 기관이 있다. 그런데 ‘가정위탁지원센터’는 이 아동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대신, 보호자가 위탁 규정을 잘 지키는지만 들여다보았다. 위탁부모 감시센터(?)라는 말이 더 정확해 보인다. 한편 이 엄마는 그 도시에 있는 대형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누구도 혼자 애쓰는 집사를 돕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 집사는 필자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연대의 정으로 맺어진 공동체가 없는 곳에서 누군들 돌봄의 책임을 혼자 떠맡을 수 있겠는가? 혼자만의 연대의 정은 그를 십자가로 이끌 뿐이다. 우리나라가 과거 고아수출국이라는 악명을 떨친 것도, 현재 지구상에 둘도 없는(출산율 1.0 미만) 최악의 저출산국가가 된 것도 연대의 정으로 맺어진 공동체를 잃어버린 탓이다. 공동체가 무너진 곳에 ‘독박 육아’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보편적 진리가 된 아프리카 속담을 여전히 흘려듣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예수는 ‘내가 먹을 것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제자들이 내어놓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성인 남자만해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한 빵과 물고기를 만들어 들판 한 가운데 쌓아놓았다고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연대의 정(compassion, 14절)을 드러냈던 예수가 바라는 것은 기적을 본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이 아니다. 예수는 그들이 진정으로 배고픔을 해결하고 만족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의 기적은 감춰지고 제자들의 나눔이 드러나야 했다.

이 명령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 명령 속에 너희는 곧 ‘우리’이며, 명령의 주체인 ‘나’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이 된다.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제자 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향해 ‘당신이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연대의 정을 가지고 나누기 시작할 때, 예수는 우리의 나눔을 만족으로 이끌 것이다. 예수에 대한 우리의 그리스도 고백은 이 나눔 속에서 현실이 된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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