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compassion:불쌍히 여김, 연민)과 오병이어 기적(4) - 공동체와 기적

나와 너에게 있는 것이 우리의 것이 될 때 기적은 일어난다. 공동체 됨 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은 채 기적을 바라지 말자. …‘타인을 위해 내어놓는 것’ 그것이 타인과 함께(com)하려는 열정(passion)의 시작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복수)라고 말한다. 부자나 부자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고, 가난한 자나 가난한 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자교회는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이 가능하지만 가난한 교회는 불가능한가? 예수의 연대의 정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community)를 향한 요청이다.

 

    잃어버린 연대의 정                  

우리사회에서 ‘동정’(同情)은 금기어다. 빠른 근대화의 과정에서 동정의 대상은 비난의 대상과 동일시된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가출청소년들은 의지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인식을 가진 기성세대(기복신앙에 익숙한 기성세대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는 자녀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저렇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동정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 ‘네가 열심히 한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동정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사회는 동정 혹은 동정심을 외면한다. 동정이 없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아니, 누군가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그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변해버린 동정이란 단어를 버린다고 뭐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를 버리면서 우리는 ‘타인과 함께하려는 의지와 열정’마저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필자는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동정이란 단어 대신 ‘연대의 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연대의 정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공감을 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신문 방송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사건에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들해진다.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당신의 상황에 공감하지만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일 뿐이다. 그 일이 나에게 닥친다면 나는 내 방식과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일은 당신이 해결해라. 그렇게 할 능력이 당신에게 없다면, 법이든 사회복지든, 제도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신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다.’

같은 환경과 같은 세대 속에서 공감대는 늘 형성된다. 어떤 일이든 공감할 수는 있지만, 문제의 해결 주체는 스스로여야 한다. 이때 자기연민(self-pity)이 일어난다. 자신이 불쌍해 보이고 때론 무능한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자기연민은 수많은 상상(복권당첨과 천사의 등장 등)을 불러일으키지만,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 상상은 꿈에 불과하며 가혹한 현실만이 놓여있음을 알게 된다. 누구도 당신을 향한 연대의 정은 없기 때문이다.

연대의 정이 사라진 세상에 기적은 없다. 기적의 부재는 주변에 예수와 같은 능력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기적은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 때문에 무언가를 내어놓는 데서 시작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내어놓음의 결과만을 기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일으키고, 로또번호를 맞추고, 불치의 병을 낫게 했어도, 그것이 놀랍긴 해도 기적은 아니다. 예수의 수많은 기적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대의 정에서 출발한 결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공동체와 기적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복음14장, 15-16절)

예수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하기 전에, ‘너희 중에 누구에게 빵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빵이 없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빵의 소유를 먼저 확인했다면, 빵이 없는 제자들은 내어놓을 필요가 없어지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책임에서도 벗어난다. 하지만 ‘먹을 것을 주라’는 단정적인 명령은 소유와 상관없는 행동을 요구한다. 마태복음은 영리하고도 약삭빠른 교회(내가 가진 것이 없는데 무얼 나눈단 말인가?)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마태복음은 가지고 있는 빵이 아니라, 요구받은 이들의 책임과 참여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가지고 있는 빵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듣고 행동하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소명도 이와 같았음을 고백할 것이다. 예수는 ‘내가 빵을 주겠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능력은 숨겨져야 한다. 드러나야 하는 것은 제자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내어놓고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놀랄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만족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도 ‘너희 중에 누구에게’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바로 ‘나에게는 내어놓을 것이 없다’는 변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적으로 부름받았다. 예수는 ‘너희 중에 가진 자’(단수)가 있으면 그가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복수)라고 말한다. 부자나 부자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고, 가난한 자나 가난한 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자교회는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이 가능하지만 가난한 교회는 불가능한가? 예수의 연대의 정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community)를 향한 요청이다.

제자들은 ‘우리’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소유이지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어느 특정한 누군가의 소유가 될 때, 기적은 그 누군가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바란 것이 아니다. 연대의 정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기적은 누군가의 소유나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적은 연대의 정을 지닌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이미 확인한 것처럼 예수가 건네준 빵을 제자들에게서 받아먹은 누구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기적은 놀랍지 않으면서도 만족스러운 것이며 행복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먼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인가?) 그러면 예수가 어떤 명령을 하든, 우리는 언제나 내어놓을 것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결코 돈이 아니다. 우리는 연대의 정에 참여할 수 있을법한 부유한 사람이나 교회를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저 함께 연대의 정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이름(이것이 참된 교회다)으로 예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나와 너에게 있는 것이 우리의 것이 될 때 기적은 일어난다. 공동체 됨 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은 채 기적을 바라지 말자. 우리(공동체)에게 있는 것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기적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반드시 일어난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20-21절)

‘타인을 위해 내어놓는 것’ 그것이 타인과 함께(com)하려는 열정(passion)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 열정은 가진 것을 내어놓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나누는 것과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까지 이어져야 한다. 연대의 정은 내어놓음에서 시작되며 끝까지 보살핌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남은 부스러기를 모았다.’ 필자가 보기에,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은 예수의 능력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책임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나누어준 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불리 먹을 때까지, 그리고 그 뒷마무리까지 책임을 다한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기적에 참여한다. 예수에게서 시작된 연대의 정은 오병이어의 전 과정 속에서 제자들의 것이 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진정으로 제자들과 함께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이었다. 우리는 이 과정에 참여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된다.
 

김명현 / 선한목자교회 담임
김명현 /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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