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0-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계속되고 있어 세계인들은 우려하고 있다. ⓒBBC 방송 캡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계속되고 있어 세계인들은 우려하고 있다. ⓒBBC 방송 캡쳐

더 나은 인간다운 세상을 꿈꾼다면, 시작은 언제나 간단하다. 시작의 시점은 ‘지금’이며, 시작의 출발은 바로 ‘나’인 것이다.

연대와 공존을 통해 평화를 이루는 길은 네 가지가 있다. 지금 당장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 평화를 위한 일에 기부하는 것, 평화를 위한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 평화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스라엘 남서쪽 해안을 따라 좁고 길게 자리 잡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가자의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전쟁 중이다. 오래된 억압에 따른 분노로 폭발된 무력도발은 곧바로 복수를 불러일으켰다. 원수에 의한 동족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기꺼이 피로 얼룩진 죽음의 바다에 뛰어든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본능은 분노와 복수심을 정의로 포장한 채 무기를 들게 한다. 죽음은 곧 백 명, 천 명을 넘어 수만 명을 향해 갈 것이다. 얻으려는 것은 무엇이며, 지키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지키고 얻어내려는 각자의 절박함이 있을 것이다.

잠깐 동물의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사자와 같이 집단을 이룬 포식자들은 같은 지역을 놓고 같은 종들끼리 싸움을 벌이곤 한다. 죽는 한이 있어도 양보하면서 서로가 공존하는 법은 없다. 승리하는 집단은 땅을 차지하며, 패배한 집단은 땅을 잃는다. 유인원인 침팬지의 집단 패싸움은 더욱 잔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인 상대를 전리품처럼 나누어 먹는 카니발리즘(동족포식)도 보여준다. 인간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국가나 종교를 통해 연대를 맺은 집단은 다른 집단과 땅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 여기에 평화란 없다. 평화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땅 때문이다. 민족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인,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강한 연대감으로 뭉쳐진 두 집단이 하나의 땅을 두고 충돌해 왔고 오늘날 다시 충돌한 것이다.

인간 사회는 동물의 세계 속에 보이는 ‘집단 패싸움의 법칙’(양보와 공존의 예외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법칙이다)을 깰 수는 없을까? 아마도 인간이 무력을 합법화시키는 국가라는 가장 강력한 연대를 이루어 살고 있는 한, 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배후에는 종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종교는 국가주의를 부추기면서 집단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게다가 종교는 국가를 넘어 동일한 종교를 가진 국가들의 참전을 부추기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적 종교의 모습이 이러한 것은 힘을 추구하는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세력이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마스의 지도자들이나, 이스라엘의 현 정부는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적 본능을 넘어 이성적이며 영적 존재라고 자부한다면, 국가라는 강제적이며 물리적인 연대를 세계를 향해 개방하면서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힘이며 역할이다. 종교는 연대의 장을 넓히면서 세대와 남녀, 인종과 국가 같은 집단의 벽을 허물면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종교가 국경을 넘어 존재하며, 국가와 인종에 국한되지 않는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넘어 타인을, 자기 공동체를 넘어 타인의 공동체와 이루는 개방적 연대가 종교적 실천의 핵심이다. 종교적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전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린다. 본질적으로는 초월적이고 이타적이어야 할 종교가 현실적으로는 동물적이며 본능적인 집단 연대를 강화시킬 뿐이라면, 종교의 존재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종교를 통한 연대가 집단 이기주의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가 초월적 가치이자 근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사랑과 자비는 타자를 포용하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이타성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와 이슬람교에 충실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당장 서로를 향한 형제애를 발휘하면서 하나의 땅을 공유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이들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손들이니 정말 형제 사이인데도 말이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도 오랫동안 땅을 놓고 싸웠다. 이긴 쪽이 그 땅에 사는 모든 시민들의 종교를 결정했다. 똑같은 신앙고백(사도신경)을 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자기 집단을 무장시키면서 상대방의 땅을 빼앗는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이스마엘과 이삭도 언젠가는 전쟁을 멈출 날이 올 것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보편적 진리를 향한 진정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가 본질에 충실한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치 시대 독일 기독교의 주류는 나치즘을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교회는 나치가 내세운 민족주의와 인종 우월주의를 선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시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종교는 사실 어느 시대나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합리화시키면서 집단 이기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곤 했다. 단지 그 가운데서도 신념과 희생을 바탕으로 종교의 본질을 지켜낸 종교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한국의 종교, 특히 한국교회는 이타적인 사랑과 타자와의 연대를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복음주의를 자처하는(복음 대신 교리를 신앙의 척도로 내세우는 근본주의자들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말할 뿐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성장과 힘을 추구해온 것이 사실이다. 보편적 인류애나 자연과의 공존 등 인류가 이타적인 연대를 필요로 할 때, 한국교회는 자기희생을 기쁨 삼아 더 넓은 세상과 연대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걸어온 한국교회의 타성을 보면, 오히려 갈등을 이용해 힘을 얻고자 폭력을 부추기는 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기꺼이 할 것 같다.

당장의 세계는 암울해 보이며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세계는 밀려오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점점 배척할 것이며, 한편으로는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도 재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슬람교도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것이며, 기꺼이 연대하려는 공동체는 그들을 환대할 것이다. 누군가는 유대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같이 슬퍼함으로써 복수심을 누그러뜨릴 것이며, 자기희생 위에 세워진 공동체들은 그들을 향해 평화의 힘을 증거할 것이다. 이들과 이와 같은 공동체는 소수일 테지만, 이들의 참된 영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갈 것이다.

더 나은 인간다운 세상을 꿈꾼다면, 시작은 언제나 간단하다. 시작의 시점은 ‘지금’이며, 시작의 출발은 바로 ‘나’인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푸념할 것이다. ‘지금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연대와 공존을 통해 평화를 이루길 원한다면, 거기에는 네 가지 길이 있다. 지금 당장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 평화를 위한 일에 기부하는 것, 평화를 위한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 평화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단계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있다. 기도로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특권이다. 우리가 무엇이든 시작한다면, 우리는 곧이어 더 넓은 세상과의 연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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