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0. 메시아 고백의 의미

메시아 고백이 정당한 것이라면, 예수와 더불어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그 순간부터 영원해야 한다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을 물리친 후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온 예수는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찾아 읽었다(누가복음 4장).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 그리고 회중들을 향해 말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21). 예수의 생애는 메시아를 고대하던 예언자의 말씀이 지금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면서 시작된다.

벳새다의 외딴 들판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대접했다(이하 누가복음 9장). 모인 사람들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반대로 만 명이든 그 이상이든 모두 만족했을 것이다. 누가복음이 드러낸 사실은 예수와 제자들이 ‘오병이어’로 식사를 마련했고, 사람들은 오병이어로 준비된 그 자리에 참여하면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대접할 재료든 대접받는 사람이든, 많고 적음에 전혀 상관없이 참여한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현장에 메시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는 과연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재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양식을 달리할 것이다. 그 나라가 저 멀리에 있다고 이해한다면 그 나라는 죽은 뒤에나 기대할 수 있는 천상의 형태가 된다. 하지만 그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이해한다면, 그 나라는 우리가 찾아내거나 만들어야 할 지상의 형태가 된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실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논리적 이해의 차원을 넘어 고백이 필요하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똑같은 것을 가지고도 여전히 불만인 사람과 만족하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그것은 가진 것의 양의 차이가 아니며, 차지해야 할 사람의 많고 적음의 차이도 아니다. 국민소득과 소비지수 등을 들먹이며 만족의 수준을 학문적으로 정해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로 만족하느냐는 오직 당사자의 ‘고백’에 달려 있다.
 

하나님 나라는 고백하는 곳에 존재한다.

예수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고 묻자 제자들이 대답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9)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예언자란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러 올 메시아를 선포하고 그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본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에게 묻는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0) 베드로가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21)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한다. 베드로는 오병이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했으며,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시아의 등장으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한편의 예고에 지나서는 안 된다. 그것이 ‘맛보기’에 불과하다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예언자, 기껏해야 능력 있는 예언자에 불과할 것이다. 메시아는 또 다른 메시아를 예고할 수 없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존재이며, 그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그때로부터 영원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를 향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아 고백이 정당한 것이라면, 예수와 더불어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그 순간부터 영원해야 한다. 메시아의 부활은 곧 하나님 나라의 부활이며, 그 나라는 그때부터 영원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한 이후, 그 나라는 끊임없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면, 예수는 베드로가 고백한 메시아가 아니며, 사람들이 이해한 예언자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필자가 논리적으로 이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사후세계라고 주장하는 신자들은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실재해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은 이것이다. ‘언젠가 메시아가 등장해 세상을 뒤엎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 나라에서 메시아는 왕이 되고 신자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어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은 다르다. 먼저 예수는 메시아의 승리가 아닌 패배와 소멸을 이야기한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흗날에 살아나야 한다”(22). 메시아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반대로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메시아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난 후 살아나야 한다.

예수에게 영원이란 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전제로 한 부활이 진정 영원한 것이다. 예수는 ‘불사’가 아니라 ‘부활’을 통해 영원한 메시아임을 드러낸다. 부활은 메시아와 그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을 확정하는 열쇠다. 놀랍게도 예수는 부활한 후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하나님 나라도 다시 가지고 올라간 것이 되므로, 부활은 하나의 징표일 뿐, 하나님 나라는 다시 세상에서 감추어졌을 것이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23)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자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바로 이것이 영원에 이르는 부활의 전제였다. 이제 부활은 제자들과 믿는 사람들의 고백 속에서 재현되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도 그들의 고백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의 삶을 재현하면서 메시아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를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다.

메시아 된 예수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써 부활의 과정을 재현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부활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24)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시작한 메시아의 길은 부활을 통해 영원에 이른다. 예수로부터 시작되어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도 이 세상에 집착한다면 이보다 더 허무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25)
 

부활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들만이 메시아를 ‘따르는’ 제자들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요구하면서, 참된 제자들을 말하는 대신 부끄러운 제자들에 대해 먼저 말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26)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집중하면서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는 결론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미 실현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27절에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이 말을 진심을 다해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올바르게 따르는 삶을 사는 제자들에게 주는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나중에 상을 준다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며 준비하는 자일뿐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따르는’ 삶은 더 이상 예언자의 삶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메시아의 말을 부끄러워하면서 메시아를 따르지 않는 자의 최후를 생각하며 반면교사를 삼는다. 그러나 메시아를 따르는 자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지 않은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한 이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고백하는 가운데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가꾸고 지켜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적어도 자기 고백 속에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을수록 이 세상은 보다 나은 세상이 될 것만은 분명하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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