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9. 만족은 환대의 결과다

환대가 이미 자행된 범죄를 되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공동체가 깨어져서 환대가 없는 사회가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는 법이 아닌 우리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가정과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면서 환대를 실천하는 시민들이 얼마나 많아지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문제는 ‘나부터’가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

콘스탄티노플이 점령했던 도시 터키,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으로 바뀐 곳에 십자가가 사원 천장에 복원돼 있는 모습.
콘스탄티노플이 점령했던 도시 터키,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으로 바뀐 곳에 십자가가 사원 천장에 복원돼 있는 모습.

오병이어! 누가복음(9:10-17)에서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환대’welcome에서 시작된다.(참고로 마태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연민의 정’compassion에서 출발한다.)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이야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고 하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10-11).

예수의 일행이 사람들을 피해 ‘물러났지만’ 사람들은 무턱대고 따라왔다. 참으로 예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그들을 맞이하여welcome,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해주고,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준다. 사실 사도들이 여러 마을을 여행하면서 한 일도 정확히 이것이었다. 예수는 열둘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려고’ 보냈었다. 예수는 그들을 보내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어느 집이든지 머물다가 떠나라고 하면서, 그들을 환대welcome하지 않는 마을에서는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했었다(9:2-5).

‘오병이어’의 장면은 사도들을 파송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앞서 제자들이 무작정 찾아간 마을에서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면, 지금 여기서는 제자들이 사람들을 환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여행을 떠났던 제자들은 자신들을 환대한 집으로 들어가 먹을 것도 구하고 잠자리도 구했지만, 지금은 무리를 헤쳐 보낼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12)

오늘날 목회자들도 이 정도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대접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대접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빈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환대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적당한 양의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대접하지 않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13)

하지만 예수에게 환대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환대는 상대의 지위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환대는 언제나 어디서나 변함없이 동일할 수 있다. 그것은 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환대란 내가 가진 물질과 재능,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14-16)

다시 생각해 보자. 예수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벳새다의 빈들로 물러났다. 우리가 일을 마치고 안식을 취하기 위해 물러나는 곳은 집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빈들은 예수와 제자들이 안식을 취할 집이다. 예수는 이 집에 무턱대고 찾아온 사람들을 기꺼이 환대한다. 그렇다면 제자들 역시 그들을 환대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환대하고 집안사람들과 함께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해서 대접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먼저 적당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사람들을 안내한다. 대접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을 축복과 함께 정성을 다해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환대는 음식의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와 제자들이 가진 것은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사람들의 만족을 누가복음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17)

이것은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만족할만한 환대를 받았다는 관용적인 표현이리라.(열둘은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다.) 환대는 만족을 가져온다. 환대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만족이라는 기적을 가져온다. 반대로 환대가 없는 사회에서 만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가난했지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시절, 우리는 환대가 무엇이며 만족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가 된 지금, 차고 넘치는 물질만이 대접과 보상의 기준이 되어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사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정부는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기업과 부자들은 기부를 통해, 교회는 선교를 통해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환대한 적은 없지 않은가. 정말 필요할 때 찾아온 그들을 외면하기 일쑤였지 않은가.

만족의 반대는 불만이다. 환대가 없는 곳에 쌓인 불만은, 예고 없이 분출하는 화산처럼 분노로 표출된다. 공동체가 무너져버린 사회에서 환대받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된 사람들이 극단적인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서울 신림동과 분당 서현역 근처에서 일어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은 최근에 드러난 예다. 인터넷상에서는 이들을 모델로 삼아 무작위의 시민을 상대로 한 칼부림이나 살해 예고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환대가 이루어지는 가정과 공동체가 무너진 것은 우리사회 전반의 문제이기에, 환대받지 못하는 수많은 대중들 또한 주체하기 힘든 분노를 가지고 있다. 대중들의 분노는 어디로 향할까? 그들이 참아왔던 분노는 분노를 극단적인 모습으로 표출한 사람들을 향한다. 사실 대중의 분노는 늘 ‘단죄와 사형’으로 분출되곤 한다. 예수의 시대에도 대중의 분노는 ‘돌로 쳐 죽여라’로 나타났다. 현재에도 관습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모습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야만의 시대든 계몽의 시대든(단두대는 계몽의 상징이다) 나아가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든 대중의 분노는 ‘죽여라!’로 나타난다. 분노가 분출하는 우리 사회도 사형의 집행과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다. 분노를 분노로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야만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범죄자들이 보여준 반사회적 분노와 대중이 보여주는 범죄자에 대한 분노는 다른 것일까? 하나는 악이고 하나는 선일까? 우리 사회가 분노를 분노로,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악한 자들을 위한, 악한 자들에 의한, 악한 자들의 사회일 뿐이며,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범죄자를 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환대가 이미 자행된 범죄를 되돌릴 수도 없다. 우리사회는 환대를 말하기엔 너무 늦은 것처럼 보이고 너무 멀리 왔다. 당장은 장갑차와 무장경찰이 필요한 해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동체가 깨어져서 환대가 없는 사회가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인 것이어서 법이 아닌 우리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물론 바뀌기를 기다린다고 이런 사회가 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정과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면서 환대를 실천하는 시민들이 얼마나 많아지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문제는 ‘나부터’가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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