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6. 공동체와 제자도
-누가복음을 통해 본 공동체의 시작(4) -

형제자매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 타인의 눈 속에 티가 보이겠는가? 정말 티를 빼내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형제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보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불편한 자가 밝은 눈을 가진 형제자매에게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할 때일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 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6:39-42).

누가복음 6장에서 ‘하늘나라’ 공동체는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고 가난의 복을 선포하면서 시작된다. 이 공동체의 원형은 제자들을 통해 오늘날 교회에도 내재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

예수는 ‘하늘나라’를 실현할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할 일’(원수 사랑과 자비)과 ‘가져야 할 태도’(심판하지 않음과 정죄하지 않음과 용서)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기독교 공동체(교회를 포함하여)가 존재하는 한 이 가르침은 제자도(배움과 전수)를 통해 연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실패의 연속이었음을 드러내준다. 끊임없이 예수의 제자들이 등장하여 공동체를 세우지만 그 공동체가 타락함 없이 지속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독교 공동체들은 타락하여 소멸되거나 타락과 정화를 반복한다. 왜일까? 그것은 사람을 스승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예수는 진정한 공동체가 유지되지 못하는 이유를 비유를 통해 말한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이 비유는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스승으로 세우는 것, 혹은 누군가가 스승이 되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도 스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는 하나님만이 주가 될 뿐이며, 예수만이 스승일 뿐이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공동체를 세운 설립자가 아무리 이 사실을 강조하고 스스로 실천하더라도, 계승자가 자신을 스승으로 치켜세우면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교회와 공동체를 세우는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보다 높을 수 없다. 하지만 이 관계를 전제로 예수는 놀라운 말을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먼저 다 배운 사람은 어떤 제자인가? 공동체 안에서 아무런 판단 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자다. 그러면 누구라도 예수와 같다. 그것이 예수의 품성이고 예수가 행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제자는 예수와 같아진다. 이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제자들의 배움

누군가가 ‘나는 예수만큼의 품성은 아니고 예수만큼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겸손이기 보다는 자기변명이나 태만에 가깝다. 제자는 자기변명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스승을 닮으려고 애써야 해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도다.

그렇다면 ‘스승과 같이 된다’는 예수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스승 됨’이 아니라 ‘형제 됨’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다 배운 제자들을 자신과 같음, 즉 형제자매로 인정할 것이다. 이제 예수는 형제자매가 될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남’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예수의 형제자매들이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래서 용서도 필요한 모든 태도들은 사실 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그러한 티를 찾아내는 나의 태도는 곧 들보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경우다. 우리 눈을 어둡게 하는 들보를 들어내지 않고서는 형제자매의 티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형제와 자매가 되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 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형제자매를 향해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먼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한다. 그러면 타인의 눈 속에 들어 있는 티를 정확히 보면서 제거할 수 있을 만큼 눈이 밝아질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은 형제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 않다. 예수가 가리키는 목적은 그 티를 볼 수 있을 만큼 제자들의 눈이 밝아지는 데 있다.

사실 형제자매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 타인의 눈 속에 티가 보이겠는가? 정말 티를 빼내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형제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보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불편한 자가 밝은 눈을 가진 형제자매에게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할 때일 것이다. 사실 어느 누구라도 온갖 심판과 정죄로 가득 찬(눈 속에 들보를 가진) 형제자매에게 자신의 잘못된 태도(눈 속의 티)를 고쳐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일한 스승인 예수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지켜야 할 ‘제자도’는 이런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공동체다움에 익숙해진 제자들이 다가온 하늘나라, 아니 이미 세워진 공동체의 중심이 될 것이다. 분명, 당신이 속하거나 이루고 싶은 공동체는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의 형제자매들이라 불릴 만한 제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일 것이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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