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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문서선교, 둘째는 수도원 복원

기사승인 [1706호] 2019.09.11  17: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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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신앙 나의 예수 >4< - 들소리 운동의 두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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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신앙과 삶의 모범 훈련장이고 교육장이다. 모여서 숫자를 말하고 개교회들의 교세자랑에 빠지면 타락한다.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교세 증가가 빠른 것은 축복 중 축복이지만…”

 

쉬운 말로 목숨을 내던진다는 말, 흔히 서투른 인생의 고비에서의 객담 속에나 담길 법한 말이다. 목숨을 던지다니, 사람의 목숨이 안악골 왈패들의 돌멩이, 싸움판의 돌멩이가 아닌데 감히 내던지다니….
 

1. 서둘러서 문서운동 시작하고 보니…

사실 나는 나 자신을 내던진 것이 아니라 가정을 내던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내 말 좀 들어보소. 앞서 얼핏 스치듯 한말이지만 나는 7살 때 출가 사문의 길을 목표하고 준비했는데 그때도 머뭇거리다가 9살 나이에 6.25가 터져서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15살 중학교를 마치는 둥 마는 둥 부모와 일가친척에게 알리지 않고 단신으로 서울로 달려와서 만 3년 만에 주 예수를 만나고 또 예수께서 나를 만나 주셨다.

1960년부터 도봉산 및 삼양동 판자촌에서 형제와 자매들이 모인 공동체를 내가 이끌었다. 그 무렵 한신대 교수였던 문동환 박사가 쌍문동 너머 방학동에서 공동체를 하실 때였다.
 

1) 선교계획과 실행

① ‌미리 준비한대로 서울 시내버스 안내양과 육군 각 사단, 전국 교도소, 구치소, 감호소, 경찰서 유치장에 선교문서 보내기다.

② 작은 교회운동, 최소한 80 가정으로 지교회를 구성하는 운동력 있는 교회운동 계몽이다.

③ 선교비 조달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하되, 문서 선교비는 회수를 원칙으로 결정했다.

위 세 가지 내용 중에 먼저 문서 발행이다. 제호는 <그루터기>와 <들소리>다. 당시 서울 시내버스 121개 노선이고, 회사는 91개 처였다. 모든 버스(회사) 안내양들을 대상으로 매주 문서를 보냈다. 희망자들을 모아서 검정 고시반을 운영했다. 원하는 안내양 기숙사에는 300~500권 정도의 도서를 출판사들과 협력하여 배치하기도 했다. 물론 원하는 회사 안내양 교양시간 강의(강연, 설교)도 했었다.
 

2. “작은 교회 운동”이 저항을 받다

선교비 협력을 해주는 선배나 교단 목호자들은 그래도 자기교회 울타리 밖을 돌아볼 여유가 있는 교회들이다. 그들을 상대로 작은 교회다, 두부모 자르듯이 할 수는 없으나 정원을 제한하는 교회운동의 요구다. 학교 학생들의 학급을 구성할 때를 보면 70년대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콩나물시루반”이 있었고, 2부제 교실들이 있었던 것은 국력이 약했을 때였다.

마찬가지다. 70년대 말 들소리 선교를 시작할 때 한국교회는 1천만 명을 말했고, 실제로 7백만 명 이상의 성도가 전국교회에 배치되어 있었다.

교회는 신앙과 삶의 모범 훈련장이고 교육장이다. 모여서 숫자를 말하고 개교회들의 교세자랑에 빠지면 타락한다.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교세 증가가 빠른 것은 축복 중 축복이지만 사탄이 한국교회를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여 타락시킬 것인가에 대한 힌트가 보인다.

그게 바로 교세자랑이다. 반드시 지교회 운동과 그 지교회들이 사안별로 연합하는 것도 훈련으로 가능하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기 위해서 어머니의 입모습이나 몸 뒤집고, 기어가고, 일어서고, 발걸음을 옮기는 과정에서 몇 만 번 몇 십만 번 한복 훈련하는 줄 아는가?

신자가 많으면 뭐하나? 구슬 서 말이라도 꿰어야 구슬이듯이 신자는 훈련이다. 자기 낮추기, 겸손하기, 섬기기, 공손한 언행, 동행하는 자의 양보 등 80명 가족이면 대략 150명에서 200명 정도 된다. 이들이 모여서 교회의 존엄을 지켜가고, 조금 큰일을 하려면 주변의 다섯이나 열 교회가 연합하면 1천여 명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정도이면 나라살림도 해낼 수 있는 인력이 된다. 대개 이런 식으로 주변과 동역자들에게 설명, 설득해 보았으나 마이동풍이었다.
 

3. 마이너스 운영의  쫓기는 생활

수입과 지출이 맞지 않는다. <들소리> 창간호를 보면 이런 공고가 있다.

“독자와 회원 여러분! ‘들소리’는 순수 국산 돈으로 만듭니다.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이 무조건 공짜로 뿌리던 문서가 아니고 우리가 직접 수입금을 올리거나 성도들의 헌금으로 운영합니다. 이 문서를 받으시는 분들은 반드시 구독료를 보내셔야 합니다.”

창간호뿐 아니라 저희는 초창기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구독료에 신경을 많이 쓴다. 구독료나 회원들의 회비는 물론, 10명 20명의 봉사자들이 노동력을 보탠다. 진짜 수입은 지난번 말한 대로 인쇄물이나 도장장사, 그림 장사, 양복 월부장사도 해 보탰다. 그런가 하면 원고 대필, 남의 책 글써주기, 출판사 교정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보탰지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발송비였다.
 

4. 정규문서보다 비정규문서로 출발했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필자는 창업 초기에 ‘매주 발행’이라는 정규문서를 고집했던 그 때를 후회한다. 하늘만 쳐다보는 빈 털털이가 감히 매주 발행하는 문서를 고집했다. 그때 나는 이런 오만을 떨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최소한 영적 호흡이 주 1회다.” 잘못된 결정이다. 옛말에 누울 자리보고 발을 뻗으라 했지 않은가.

매주 발행하는 문서의 발송준비를 해놓고, 발송비가 없어서 하루 가고 이틀 지나면 나는 벌써 미친다. 부끄럽고, 내가 밉고, 초라한 내 몰골이 한없이 처량하다, 그때는 3종우편물 제도가 들쑥날쑥해서 우체국 가서도 직원들과 언쟁을 하기도 어려운데 외상 할 수도 없고, 전당포에 가지고 갈 마땅한 물건도 없고…, 참으로 힘들었었다.
 

두 번째 목표인 수도원 운동 복원 준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로 선두로 일어나서 중세 유럽의 기독교(가톨릭)를 개혁한 역사의 흐름은 마치 구약과 신약의 갈림길에 버금가는 엄청난 의미의 변화였다. 천지개벽과 같은 충격이었다. 이에 대하여 역사 또는 신학적인 부분은 별도로 하고 이 지면에서는 수도원 운동의 복원을 말하고 싶다.

루터시대에 수도원 운동이 많이 무질서했다. 그러나 교황청의 불법과 무법보다는 훨씬 더 작았다. 기독교의 수도원 운동은 아프리카의 안토니우스를 출발점으로 고대, 중세 초중기를 이어오면서 로마제국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야만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문명화시키고 세계기독교의 튼튼한 기반을 쌓은 기초 역량은 수도공동체에서 나왔다.

생각해보라! 게르만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AD 476) 이후 3백여 년은 서로마는 완전히 문맹지대였고, 교육과 문화 기독교 지도 기반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 수도공동체가 야만세력 게르만족에게 글을 가르치고, 신앙을 그들 가슴에 심어주어 “게르만 로마 곧 신성로마제국 교회”가 프로테스탄트 세력에게 기독교 주력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루터와 그 동반자들이 수도원을 짓밟고 수녀원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신생아 시신을 찾겠다면서 수도원과 수녀원의 마룻장을 뜯고, 수도원을 부수고, 수녀를 시집보내려 할 때 말 안 듣는다고 성폭행은 물론 폭행을 하고, 심지어 보쌈 방식으로 수녀들을 홀아비들에게 넘기기도 했다. 그때 비텐베르크 루터의 집으로 피신 온 수녀들 중 한 사람이 루터의 아내인 카타리나였고 그녀가 이끄는 어린 수녀들이 있었다.

개혁의 격정기가 지난 후 제도 개선을 하여 수도원과 수녀원을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신부나 수녀, 비구나 비구니는 예수님 이마에 돋아난 뾰루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 땅이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로 복원되어갈 기회가 올 때는 없어져야 할 한시적인 제도다. 아무리 경건하고 고상해도 독신 수도자보다 모범가정이 더 도덕적 또는 인간의 완성적 단계로 볼 때도 우위다.

마르틴 루터는 최소한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한 교회 두 제도”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유일교회로 회복될 때까지만 이라도 더 많이 기도하고 희생할 전문가 양성을 위한 수도원과 수녀원 제도를 이어갔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1) 1987년 이후 수도공동체 전념하겠다.

힘들었으나,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들소리 문서선교를 앞장서서 이끄는 일을 1987년, 그러니까 10년간 봉사하고 1988년부터는 수도공동체를 준비하기 위하여 경기도 일산, 의정부, 용인, 이천, 여주, 장호원, 안성 등을 많이 찾아다녔다. 작은 공동체를 위한 조그마한 둥지를 틀고 싶어서였다.

1966년 군 제대 후 전남 나주 봉황면 큰 외숙이 산지 3천 평 주시겠다고 해서 뛰어드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결혼을 하게 되어 그 좋은 산지를 놓쳐버렸던 때의 일까지 떠오른데 마땅한 위치를 확보하기가 쉽지도 않았다.

더구나 1987년과 1988년은 88올림픽과 더불어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본격 시도를 하던 때, 그 다음 해는 소련이 붕괴되기 시작하여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중국 등으로 선교 인력들이 진출하던 때라 한국교회는 한 단계 성장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현대는 조선조 억불정책에 따라서 산중으로 쫓겨난 불교의 승려들이 세속사회 깊숙한 곳으로 진출하여 포교를 한다. 이 같은 시대 요구는 우리 기독교 역시 도시 공간에서도 “수도 공동체”가 많이 필요하다. 정숙한 묵상의 시간, 몰입하는 기도의 시간은 부족하지만 도시나 산속의 토굴 관계없이 우리 기독교는 2019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볼 때도 완전한 헌신의 수도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1980년 상황을 2019년에 말하면서 나는 지금 1988년 수도공동체에 전념을 못했고, 들소리 문서운동 또한 손을 놓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도 생각하면서 부끄럽지만 모든 나의 고백은 현재진행형이다. 주여! 지금도 이 글을 도우소서.

조효근/본지 발행인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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