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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인생,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가?”

기사승인 [1704호] 2019.08.14  13: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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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신앙 나의 예수 >3< - 문서운동 실패와 재출발

나의 인생관은 최소한
한 개인이 자기 특성과
역량 발휘를 위해서는
“1백년 정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나
아직은 “작은 꽃 한 송이” 수준이기에
작은 열매 맺기를 위해서
내가 교회나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1백년 수고“가 먼저 필요함을
내 스스로에게 늘 요구했었다.

   
▲ <들소리> 창간호

되돌아 지난 40여 년 전, 1976년과 1977년이 뒤바뀌던 그 겨울밤들. 도무지 나의 결단과 행동들을 양해하거나 용납해 줄 수가 없었다. 후회를 1천 번 해도 소용이 없는 그날들을 혹시 면피해 보고 싶은 잔재주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평가해도 어리석고 바보 같은 놈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후회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나의 결심들을 실행에 옮기는 일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 행상길에 나서다

동대문 <금성당> 도장포로 갔다. 인감도장, 서류 인쇄용 견본을 가지고 행상을 하기 위하여 준비한 자료들이다. 내가 잡상인 생활을 한 지는 오래 되었다.

첫 번째는 고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그때 1957년부터 3년 동안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고 앞서 말했고, 오늘은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대를 다닐 때부터가 된다.

동대문 김 선생, 해병대 출신 그 사람이 나를 곱게 보아 늘 격려를 해주면서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내게 권했다.

나는 도장 주문 맡아서 심부름을 해주고 작은 수입금을 모아서 선교활동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잡상인 비슷한 일은 1957년 이후 서울생활에서 참 많이 했었다.

구두닦이, 열차 잡상, 다방 순회 소모품상, 책 월부 장사, 양복 월부 장사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쉽게 하다가 중단해도 크게 번거롭지 않고, 아침, 낮, 저녁 휴일 등은 물론 비오고 눈 오는 날씨와도 상관이 없었다. 도장 새겨다 주고 이문을 남기는 일은 하기도 쉽고, 중간에 잠시 멈추기도 괜찮고, 미수금이 남아서 골치 아프지도 않아서 간결했다.

“도장이나 인쇄물(영수증, 견적서 주문하세요!”

부지런히 행길 가게들을 순방하는 일은 간결했다. 길 따라 동대문에서 출발, 종로 서대문 교남동을 지나서 무악재 넘어 홍은동, 그리고 불광동 너머까지 갔다가 되돌아 올 때는 건너편 길 따라 가게들을 방문한다.

다시 기자촌 입구에서 홍은동, 무악재 너머 서대문에서 을지로 통으로 가서 을지로 2, 3, 4, 5, 6가를 지나서 신당동, 왕십리, 한양대 앞에서 다시 건너편 길을 따라서 동대문 방향을 잡고 행상길은 계속된다.

왕십리 을지로 6가, 동대문을 지나서 청량리, 중랑교나 이문동 저 너머를 돌다가 동대문 금성당에 도착하면 내 견본가방에는 주문한 막도장, 인감도장, 견적서, 영수증 등 인쇄물 주문서들이 쌓여있다.
그 날들 따라 수입이 다르지만 보통 10만 원 정도 수입 계산이 되면 행상길을 멈춘다. 시간을 아껴서 성경도 읽고, 기도하고, 글도 써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행상을 하면서 마냥 시간을 사용할 수 없었다.

2. <그루터기>와
   <들소리> 만들기

그루터기와 들소리, 앞서 밝힌 대로 <그루터기>는 이사야 6장 13절을 만나면서 상징성을 포함하여 주간 발행 문서의 제호로 확정됐고, <들소리>는 사실 월간지 제호로 준비했었다.

그런데 1977년 1월 1일자로 <그루터기> 창간호를 발행하여 1년 쯤 지나면서 사고가 났다.

나는 본디 선교회를 창업해도 혼자 힘으로 할 만큼의 규모를 생각해 왔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지)교회 하나를 이끌고 갈 만큼의 활동 폭을 생각해 왔다. 나의 신앙고백을 담을 수 있는 수준의 작은 규모를 계산했다.

여기에는 내가 1960년대 전후 한국교회 현황을 생각하면서 계획한 일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역사의 분량이나 경험(이력)이 많이 부족하고, 특히 한국인의 성격은 연합으로 하는 일  솜씨가 취약함을 감안하여 마치 도공이 자기 책임의 도자기를 굽는 일로 최소한의 자기 예술성에 전념하듯이 아직 우리 한국교회 사람들은 연합사업보다 혼자서의 기능에 더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의 인생관은 최소한 한 개인이 자기 특성과 역량 발휘를 위해서는 “1백년 정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나 아직은 “작은 꽃 한 송이“ 수준이기에 작은 열매 맺기를 위해서 내가 교회나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1백년 수고“가 먼저 필요함을 내 스스로에게 늘 요구했었다.

3. <그루터기> 이름의
   문서 활동 위기와 실패

내가 <그루터기>를 주간 문서로 세상에 내보낼 때 신학대 동창 두 친구가 참여했다. 특히 한 친구는 조금 조심스럽기도 했고, 그래서 망설이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선교활동 착수와 가정탈출 사건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나는 쫓기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앞뒤로 압박이었다. 특히, 나는 미취학 자녀를 셋이나 둔 아비요 보호자로서 가정을 깨뜨렸으니 앞으로 발생할 처자식들에 대한 책임과 아비로서의 도덕성 다지기와 전도자(구도자) 일생에 대한 두려움을 날마다 지워낼 수 없었다.

또, 가능하면 실패를 하지 않아야 하기에 친구들과 동업(?)이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나는 두 친구 중 하나에게 “각서”를 요구했다.

“친구야, 의심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같은 사상과 신앙으로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교회학생들로부터 잡음이 일어나거나 우리의 활동에 지장에 있어서는 안 되니까, 내가 요구하는 대로 각서 한 장 부탁한다.”

친구는 당황해했다. 그리고 섭섭해 한다. 그러나 나는 단호했다. 내가 요구하는 각서를 써주지 않으면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친구는 한동안 망설이면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때 종로 3가 조흥은행 지점과 서울극장인가 하는 극장에 붙어있던 다방에서 우리 둘은 냉정한 승부를 했다.

나는 끝내 친구로부터, 조효근의 신학적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아서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것을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친구는 친구대로 사귐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걱정했던 대로 친구들은 나를 마음 아프게 했다. 주변 독자들 말이라고 하면서 조효근의 신학은 너무 진보적이고 글들이 너무 문학적이라는 소문을 그들 주변에 달고 다녔다. 그해 겨울(1977년) 나는 두 친구(2명의 친구 이름을 아직은 밝히고 싶지 않다)들을 서대문 굴레방다리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지점 옆 청용다방으로 불렀다.

나는 말했다. “긴 이야기 안 한다. 이미 공공 전도문서가 된 <그루터기> 주간지를 마땅히 내가 지켜야 하지만 우리는 더 살아가면서 한 조각 남은 우정은 살려가야 한다. 옛 사람들 말하기를 큰길(복음의 세계)을 가는 자는 천하가 다 나를 도와도 외로운 법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우정은 조금 남겨두자.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동안 발행한 <그루터기> 문서를 너희 두 사람에게 넘긴다. 그리고 독자 주소록도….”

친구 둘은 말을 이어받지 않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지난 1년 수고비로 나는 캐비닛 하나를 증거로 가지고 있겠다.”

이 캐비닛은 내가 청계천에서 직접 사온 기념물로 지금도 종로5가 (연건동) 내 사무실에 두고 사용한다.

두 친구를 돌려보내고, 나는 안타까웠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내 인생 가는 길에 더는 망설임이 없기를 바랐는데 35살 중년의 나이, 무려 15년을 준비했던 전도운동 출발점에서 좌절을 하다니….

4. 홀로 걷기,
   자비량 복음인생 다시 출발

다시 출발이다. 더욱 철저하자. 자비량 복음인생을 더욱 다지고 다듬자. “자비량“이라는 용어는 바울 선생의 고린도 전도기간에 형성된 신학적 시도 같았다. 바울은 늘 자기와 베드로를 비교하기를 즐겼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선교협력 과정에서 천막 깁는 일 등을 하면서 중간기 활동을 했던 바울 사도가 자비량 신학을 얼마나 정돈했을까?

나는 자비량을 메시아 예수에게서 찾는다. 예수의 복음, 궁극은 탈 성전, 탈 교회당 조건의 해체로 본다. 우선 하나님이 사람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경배 받아야 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나 너와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 하셨으니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세계관, 종교관의 차이와 차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는 제사장 노릇을 하거나 당시 종교인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그냥 사람“이셨다. 주님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인간 구원절차를 준비하지도 않으셨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포함한 그 산의 한 중턱인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의 죽으심이 거룩한 예배(예식)의 절차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람(아들)으로서 신앙고백을 이루셨을 뿐이다. 좀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 예배는? 종교는? 기독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조효근/본지 발행인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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