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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기사승인 [1702호] 2019.07.10  13: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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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신앙 나의 예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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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 세상에
메시아 예수 이후에는
종교 만들지 않았다.
예수 이전에 만든 것들은
예수가 등장하면서
예수 안에서 다스려진다.
용해되고 순화되고
일치의 길을 가게 된다.
하나님이 종교를 버렸는데
누가 종교를 만들겠나.

 

약속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약속, 더는 맹세하지 말라 하셨으나 내게 있어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약속은 운명 이상이었어요.

나는 1960년 11월의 밤 약속 이전, 1957년 4월 출가(出家)의 길에 나섰어요. 최초의 출가 결심은 1947년이었으나 미적거리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계획이 순연되었다가 1957년 중학교 마치던 해에 출가를 행동에 옮겼어요.

부모 형제 일가친척의 동의 없이 무단 출가를 했으니 죽음이 가로막기 전에는 뒤로 물러섬이 없었죠.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동안 고학과 구도를 하면서 죽음 같은 경험을 여러 번 했어요(이 기간 3년은 후일 별도로 고백하겠습니다).
 

1. 1960년 11월 18일 그 밤의 회상

1947년부터 1960년까지 13년간의 “예수 공부”는 드디어 주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얻어냈습니다. 저는 태생적 은혜라 여기지만 7살부터 단독 구도의 길을 목표했습니다. 진리를 얻고 싶었어요. 하나님이 지시하고 내가 아멘 하는 은혜의 길을 간절히 원했어요. 드디어 1960년 11월 깊은 밤에 내게 말씀해 주셨어요.

“내 길이 독생자의 길이니 너는 나를 업으라. 너의 길 또한 단독자의 길이요 또 너는 나와 하나 되는 은혜를 받았으니 나와 동행하라!”

이 말씀을 요한복음 2장 19절을 읽을 때 주셨으며,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서 인증을 해주셨어요. 저는 그때 성령 안에서 믿는 사람은 하나의 제사장이요 또 하나의 교회임을 깨달았어요. 내가 깨달았다기보다 주님이 가르쳐 주셨지요. 곧 이어서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아, 믿는 자들에게는 날마다(every day)가 주의 날임을 발견했어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는 매일 매일이 안식일임을 또 배웠어요. 이 배움의 시간에는 주께서 바리사이들과 대결하실 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마 12:8)이라 하시는 말씀과 깨달음이 이어지더군요.

모든 믿는 자가 제사장이요 그 당사자들에게는 특정한 어느 하루(일명 주일)가 거룩한 날이 아니라 월, 화, 수, 목, 금 토, 일요일 전체가 주의 거룩한 날임까지 신학적 정돈이 되더군요.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지요. 내가 살아가는 교회, 교우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때 열여덟 살 애숭이로서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어요.

“나는 단독자로서 나는 제사장이다.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다. 나만이 아니라 천하 만인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면 모두가 만인제사다! 또 어느 특정한 날이 안식일이나 안식일 대신의 날이 아니라 모든 날들이 주의 날이기에 예배하는 날이라” 하면서 주변인들이 나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얼핏 들으니 “저놈이 미쳤다!”는 소리도 내 귀에 들어왔다.

사도행전 5장, 6장을 읽고 7장을 펴니 스데반이 바리새인 사울 일당에게 잡혀서 죽고, 예루살렘 교회는 풍비박산이 되고, 독기를 품고 피를 본 사울 일당이 유대 각 지역과 사마리아 일대는 물론 요단강 건너편 지역과 레바논 시리아 다마스커스 일대를 이 잡듯이 찾아다니면서 예수의 사람들을 죽이려 찾아다니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사울이 예수를 만나서 바울 되더니 예루살렘 교회, 날마다 예배하는 예배의 격식을 한 주일에 한 번씩 바꾸었다. 교회사나 교리사 내용을 포함해도 바울의 이방지역 세력이 주축이 되어 예루살렘의 날마다 교회(every day church)를 한 주 하루의 교회(sunday church)로 변형시키는 세속교회 형태로 전환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1960년 11월 이전에 신구약 성경을 정독으로 30회 정도로 했었고, 당시 송락원 선생이 쓴 세계 기독교회사(575 페이지)를 읽으면서 “이 땅의 교회가 예수를 참 많이 배반했구나!” 하는 의분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세계교회사 이야기를 꺼냈으니 더 보태고 싶은 말이 있다. 교회시대(성령 오순절 강림) 이후 역사 위의 기독교는 기독론에서 범죄를 많이 저질렀고, 그 여파로 네스토리우스(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단 정죄 출교를 했고, 서로마 멸망기의 민족 이동기의 불안정한 서로마나 동로마교회의 갈등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지 못해서 아라비아 이단자 무함마드를 지중해 권으로 불러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음도 대체로 정리하는 내 수준이었다.
 

2. 1960년 무렵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1976년 겨울 밤 콘크리트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데 (나는) 대책이 없었다. 사실 나는 집에서 처자식을 뒤로하고 한겨울에 집에서 나온 심정은 마치 집에 불이 나서 잠옷 입은 채로 뛰쳐나오는 정도의 절박함 때문이다.

앞부분에서 말한 대로 1960년 11월 이후 나는 전도에 미쳐서 뛰어다녔다. 수십일 동안 혼자 맨몸으로 걸으면서 일명 무전 전도여행을 나주에서 서울로 향해서 걸으며 전도와 기도를 했던 날이 있었으며, 도봉산 골짜기 판잣집에 기도 동지들과 공동체 생활 경험도 있으며, 군 생활 중 사단 군종부 설교 담당자로 전 사단을 뛰고 달렸던 일, 아직 신학교 공부 이전인데도 부흥사 활동, 산상집회 인도, 어찌하여 결혼까지…. 일곱 살 때부터 독신을 맹세했던 자가 스물일곱에 가정을 이루었으니. 참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

내게 예수를 배운 사람들이 나를 떠난다. 내 곁에, 아니면 나와 함께 할 수도 있는데 떠난다. 주변의 교회들로 간다. 내게 복음을 배운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동생들도 내 곁에서 나와 함게 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가버린다.
 

3. 준마는 마굿간에서 죽지 않는 법

나의 복음의 동행자가 넉넉지 않다. 그러니 내게 이렇게 내게 배운 자들이 떠난다고 푸념어린 말을 해보지만 그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버린 것이다. 내 제자? 제자란 본디 스승을 뛰어넘어야 가능한 법이다. 또 내가 제자를 둔다는 건방진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다만 동행자가 쉽지 않아서 자꾸만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러면 그렇지. 내 모양새가 떳떳하지 않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하시지 않던가.

예수를 배우고 따른다 하는 자들, 우선 나 자신을 보거나 주변을 바라볼 때 될성부른 것들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열 중 하나, 십일조는 내 것이라 하셨으니, 10명 중 1명은 예수 비슷한(방불한) 모양새가 나와야 한다. 쓸 만한 재목이 되려면 교회 안에서 장사꾼, 삯꾼 따위들을 몰아내야 한다.

왜 “만인 제사”가 나오지 않은가?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거저 받았느니 거저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교회 구성원들을 보면 산 자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목자라는 자들이 유심이 살펴보면 “방목”을 하지 않는다. 유대땅의 들과 산에는, 초원지대의 목장은 모가지 비틀어 반 쯤 죽여 놓는 목자들이 없다. 목자들이 양떼를 자기 자식처럼 가꾸고 길러낸다. 모가지 비틀어 반신불수를 만들거나 눈알을 뽑거나 맹신 광신자, 조현병 환자 비슷하게 만들어놓지 않고는 그 목장에 만 명 십만 명이 우글거릴 수 없다.

두셋이면 된다, 그러면 인자도 그 가운데 있겠다 하시지 않던가. 이 대목까지 읽으면서 모든 교회가 다 그 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해는 말라. 숫자는 상관없다. 문제는 신자들이 그 안에 있느냐를 묻고 싶은 것이다. 창의력이 있는 자, 여보게! 나는 이제 자네를 더는 가르치기가 조심스럽네, 따로 스승을 찾거나 아니면 자네도 나처럼 나가서 목회를 해보면 어떨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홀로 설 수 있는 신자를 길러야 한다. 만인 제사, 제사장을 길러내야 한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일으키리라(요 2:19) 하실 때 그 말씀 속에 담긴 뜻 잡으라. 죽음을 통과하라. 자기를 버리라. 영원히 버리라. 버려진 것으로 여기라. 문법상 현재 완료형 자기를 확인하라. 세속인의 목숨이 끊어져야 한다. 십자가 통과가 거기까지 동행이다. “이 성전”으로는 아니다. 성전시대를 끝내라. 자기 자신이 홀로 성전임을 확인하라. 일개미들이 짓는 개미굴 같은 예배당이 교회요, 그곳의 특별한 직임 신성불가침의 신분자로 버티고 있는 제사장이 아닌 천하 만인, 불특정 모두가 예수 이름으로 제사장이요 교회인 신분이어야 한다.

교회들 구성 조건도 마찬가지다. 모든 신자가 교회의 기본단위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다. 그가 머무는 곳, 머무는 시간, 또 그 날짜들 365일 모두가 거룩한 날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종교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이 모리아 그 언덕 300미터 지점인 골고다에서 독생자 예수를 바칠 때 이 지구상에서 종교는 없어졌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메시아 예수 이후에는 종교 만들지 않았다. 예수 이전에 만든 것들은 예수가 등장하면서 예수 안에서 다스려진다. 용해되고 순화되고 일치의 길을 가게 된다. 하나님이 종교를 버렸는데 누가 종교를 만들겠나.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아니니까 제주(제사장)는 필요  없다.

예수님은 제사장 아니다. 제자들도 그래서 가톨릭은 평신도 모임을 “사도들회”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기존 양심을 지켜내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세례(성령)를 받은 교회는 태산처럼 크고도 광대하지만 낱알처럼, 마치 핵분열 하듯이 하나씩 따로 놀아도 다시 하나의 명령(하나님 말씀) 앞에서 태산같이 웅대한 결집력을 가질 수 있다.
역사가들이나 전쟁 연구가들은 징기스칸 기마병의 용병술을 지금도 연구한다. 그들 병사가 전성기에 10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기마병 앞에서 100여 년 동안 동서 유럽과 러시아가 벌벌 떨었었다.
이 글을 쓰는 시간은 1남 2녀, 마누라까지 내팽개치고 뛰쳐나와서 4평짜리 건물 콘크리트 바닥에 누운 12월 추운 밤, 바로 그 시간 준마(駿馬)를 꿈꾸는 1976년 그 밤의 나의 기도다. 조랑말도 육종(育種)하면 준마 된다는 잠언을 읊조리며, 지금 내 수준이 비록 조랑말 꼴이라 해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혹시 죽더라도 예수하고 같이 죽을 각오를 가지고 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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